한국교회들은 우리들은 FTA가 경제 성공의 보증수표인양 받아들이며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교회 내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대형교회가 개척교회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게 되면서 권력구조가 생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교회의 경우는 개척교회를 원조하면서 그 교회의 인사권을 개입하는 경
YMCA, YWCA 등으로 대표되는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여성 평등화 운동 또한 초기 기독교선교사와 교회, 기독교 단체들을 통해 일어나게 된다. 1911년 신민회는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면서 전국에서 600명~700명이 체포되고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을 정도로 기독교의 사회 선교적 항일민족운
있으며, 항일의식을 약화시킨다. 또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농촌경제 등의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여, 이에 실망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
반면 보수 개신교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항일 운동에 소극적.
운동가를 배출해 우리나라의 독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고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6-70년대의 고도 성장기를 거친 한국개신교의 역사는 이제 한 세기를 넘겼다. 그리고 그 100년이란 결코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나라에서의 개신교의 성장은 세계 종교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