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씨는 아랫부분만 열리는 버튼식 소형 환기창 밑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투신했다. 숨진 기씨는 ‘어범과 며느리에게 미안하다. 화장해 달라’ ‘머리와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서 살기가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경찰은 평소 기씨가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가족들의 말에
기씨(奇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이백겸(李伯謙)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중인(仲人)의 흉중에는 진초(秦楚)의 위엄이 숨어있다”라고 하였음으로 그의 호를 “진초”라 하였다.
일찍이 큰 포부를 안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덕량(德量)을 길러 일대종장(一代宗匠:경서에 능하고 글
기씨(奇氏)의 세력이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365년에는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되었으나,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기까지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 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기씨 집안의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까지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황후가 고려에 부정적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닐 것이다. 기황후 덕분에 고려식 의복,모자, 신발, 장식품등이 원의 여인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고 고려 출신 환관과 공녀들이 원 황궁과 조정을 지배하게 됬다고 한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