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20/01/07(임진) / 흠경각이 완성되어 김돈에게 기문을 짓게 하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김돈(金墩)·직전(直前) 김빈(金)·호군 장영실(蔣英實)·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사인(舍人) 정척(鄭陟)·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논어》 등 책의 자형(字形)을 자본으로 삼아, 주자(鑄字) 20
김돈과 김빈은 천문 기기를 설계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7년의 걸친 천문기기 제작 사업은 주로 이천과 장영실이 진행하였다. 또한 천문관측을 위해서 세종은 고려 시대부터 왕립 천문기상대 역할을 하던 서운관(書雲觀)의 이름을 관상감(觀象監)으로 바꾸고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簡儀臺)를
. 따라서 사실상 분급, 회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를 보완하는 법으로 진고체수법이라 하여 다른 사람이 반납기한이 지나도 몰래 가지고 있는 토지를 신고하면 그 사람에게 주는 제도도 시행하였다.
참고문헌: 김돈,「뿌리깊은 한국사 샘이깊은 이야기 4권」, 솔출판사, 2003, 121p~122p
김돈(金墩)·최만리(崔萬理)를 박사(博士)에 임명하였다.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직전(直殿)·직각(直閣)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