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류가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무인이자 북병사였던 이괄이 대장을 맡아 병사를 통솔하여 반정을 성공시켰다. 반정 다음날 회의에서 이귀가 이괄의 공을 거론하며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해야 한다고 했지만, 김류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이괄은 김류를 비판하
김류,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
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
김류(金)였으나 실상은 이 식이 주관함.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음, ‘이순신=충신, 원균=역적’의 전거(典據)가 된다.
⇒ ‘원균복권론’: 이식은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로 종친의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이순신을 추 앙하고 원균을 폄하했다. 그러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병자호란이란?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2차 침입으로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