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인 김병로의 독립운동
(1) 인권변호사 활동
가인이 법학자로 출발한 때로부터 3년 반이 지난 1919년 3월 1일에 조선에서는 항일 독립 투쟁의 함성이 퍼졌다. 1919년은 가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하였고, 3·1운동을 계기로 전문학교의 강사이던 가인은 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김병로는 반민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더니 2월 24일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제2회 39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급격한 하향이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4)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북한 사회구성원들은 공동
2) 김병로, "남북 사회통합문제", 「민족통일과 한국기독교」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4,p.220- 222.
3) 한백연구실, "통일한국의 당면과제" 「포럼2lJ , 93. 겨울호, p.21을 김병로, 1994, p.226에서 재인용
김병로(金炳魯) 백관수(白寬洙) 조병옥(調炳玉)등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조직을 본 원세훈(元世勳) 중심의 고려민주당(高慮民主黨)과 단합하여 8월 28일에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을 조직하기 위한 발지 총회가 결성되었으며 한편 백남훈(白南薰) 윤보선(尹潽善)등은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