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
김세필의 십청헌집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양명학의 전래시기를 1521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될 무렵 학문적 풍토는 주자학 일변도였으며, 또한 그것이 통치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할 지라도 이미 주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
경주김씨(慶州金氏)
[유래]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의 삼성(박,석,김) 가운데 하나다. 시조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신라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주김씨는 경
◎ 양명학의 배경
14세기 몽고(元) 통치의 점차적인 쇠퇴는 황족 내의 분열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1340년대의 반란과 1351년에서부터 1353년에 이르는 여러 중요한 반란 등은 원元의 패망을 재촉하였다. 한편 1333년이래 15년간 빈번히 일어난 기근은 황하의 범람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홍수와 기근은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