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녹동서원
영암에서 최초로 건립되었고 또 영암 유일의 사액서원인 녹동서원은 후일 영암에 유배되어 온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농암 김창협(農岩 金昌協) 부자가 추배되기는 하였으나 본래는 연촌 최덕지를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존양사라는 전주최씨 가문의 문중사우였다. 즉 녹동서원의
김수항은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냈다. 큰 형 몽와(夢窩) 김창집 역시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형 농암(農巖) 김창협은 여한팔대가(麗韓八代家)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문장가이며, 셋째형 삼연(三淵) 김창흡은 창협과 더불어 대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김창업은 나이가 7세 되던 해인 1664년, 아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 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 (九雲夢)> 을 집필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구운몽》
김수항, 김수흥 등도 유배나 賜死의 비극적인 운명을 겪은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하여 관계진출의 문턱에 샀던 19세의 옥소는 관계의 무상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옥소는 관계진출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계진출을 외면했던 옥소는 문필과 탐승여행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