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 즉 1차 진주성 싸움을 중심으로 김시민 장군의 일대기를 통해 임진왜란을 살펴보고 진주대첩의 전개와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김시민(金時敏)과 임진왜란(壬辰倭亂)
김시민은 명종 9년(1554) 충청도(忠淸道) 목천현(木川懸)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天安市)의 옛 이름이다
김시민(金時敏) 등 25인을 제향하고 있다.
서원과 사우의 비교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우는 서원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파악되어져 왔다. 사액의 경우도 서원이 465개중 208개가 사액을 받아 전체 사액률이 45%에 이르는데, 사우는 504개 중 71개로 고작 14%에 머물고 있다. 제향된 인물의
1. 근현대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
(3) 최경회 장군과 2차 진주성 전투
- 2차 진주성 전투 직전 조선군의 상황
: 진주성 방어전략에 의한 의견충돌로 인해 성을 비우고 병력을 보존하자는 공성파와 왜군의 호남지역 진출을 막기 위해 진주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수성파로 갈림.
●공성파 : 의병장 곽재우와 임태영, 순변사 이빈
5. 평양성의 탈환과 강화
1) 평양전투와 벽제관 전투, 행주전투
1592년 12월 25일 제독 이여송은 군사 3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1593년 1월 5일 무렵에는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순안에 주둔하였다. 1월 6일, 약 8천의 조선군사와 함께 이여송의 군대는 평양성을 포위했다. 2천의 의승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