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하고 국회를 해산시켰고, 대총통 선거법을 수정하여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해 독재체제를 확립하였으며, 말년에는 황제를 선포하기까지 했으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쓸쓸히 죽었다. 위안스카이가 이렇게 사망한 뒤 이제 중국에는 전국을 통제할 만한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10년간 중국은 무정부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조선은 최초의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강화도조약 직후 정부의 개화정책으로 정치의 시야가 넓어지고 국방체제가 개선되고 있었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민비 세력의 부패한 모습은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쌀을
(1) 전쟁 초기
1893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 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그 유해는 청나라의 전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내어졌고, 조선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봉기에 고종 황제가
김옥균 등의 변법개화파가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1894 갑오개혁 - 일본의 조선 침략의 야욕을 위해 실시한 개혁으로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1895 을미사변 - 일
2)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김옥균은 철종(哲宗) 재위 2년(서기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金炳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얼굴이 백옥 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옥균은 여섯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冀)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