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약전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고려 상장군 금용(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안세(安世)의 8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열의 아들로 명종 9년(1554)에 인동 남산에서 태어났다.
7세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부친을 잃고 11세때 학자인 신당 정붕의 아들 정각(鄭慤)이 보고 "
8.6. 사림문학, 심성에서 우러나는 소리
8.6.1. 김종직과 그 제자들
조선 초기 사대부 세력 가운데 한쪽은 중앙 정계에서 기반을 굳혔으나 다른 한쪽은 지방 중소지주의 위치에서 진출할 기회를 찾아 서로 대립했다. 지방 중소지주가 먼저 두각을 나타낸 곳이 영남지방에서도 선산이었다. 지방 중소지
이때는 곧 사림파 학자들이 주체가 되어 성리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때이므로 그들의 학통(學統)의식을 고려하면 사람파의 연원은 고려 말의 절의파에서 찾을 수 있다. 기대승(1527~1572)은 우리 나라 성리학의 학통을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의 건국과 더불어 가장 큰 변화라면 무엇보다 국시로서 고려의 불교가 이씨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신흥문학인 성리학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바꾸어 말해 조선조는 〈척불숭유〉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성리학을 건국의 이념, 국시로 삼고 봉건 왕국의 제반 문물제도를 재 정비, 확립하였다. 성리학
1. 시조의 정착과 성장
1) 왕조창건기의 시조
시조는 공식적인 기능이라고는 없으며 개인적이기만 한 노래이다. 악장이나 경기체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왕조창업의 칭송은 시조와 무관하고, 고려를 회고하는 시조는 거듭 이루어져 시조가 개인적인 노래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