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소설가이며 호는 상허로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921년 휘문 고보를 거쳐 1926년에서 1928년 가을까지 일본 죠오치대학에서 배웠다.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고, 1928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학생》, 《신생》등의 편집에도 관여했다. <조선일보>, <조선 중
이태준은 1925년부터 6·25 직후까지 약 30년에 걸쳐 단편 60여 편과 중·장편 18편을 발표한 韓國現代小說史의 대표적인 作家이다. 1904년에 태어나 22세 때인 1925년 7월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되며 문단에 나온 그는, 《개벽》 社에 입사하던 1929년 이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 소위 암흑
내일 전후를 예보하느라고 거리를 시끄럽게 했던 것이다. 월급으로 모두 주머니들이 묵직묵직해진 월말인 데다 벚꽃이 반넘어 피려는 때에 날이나 받은 듯이 알맞게 끼어 있는 일요일이니, 자연과 절연되어 사는 서울 사람들로서는 이날 하루의 청명을 바라는 것이 그리 과분한 욕망은 아니었다.
Ⅰ. 서론
1930년대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는 이태준은 여러 글을 통해 크게는 언어 작게는 조선어 더 작게는 소설어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 언어를 지키는 것이 민족을 지키는 지름길이 되는 것임을 역설했다.
언어가 한번 불행하여 제 민족에게서 떠나 버린 날은 그
꽃송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고향에 심어놓고 온 사꾸라가 생각이 난다. 그는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사꾸라 나무는 심어놓고꽃이 피는 건 보지도 못하고 여기 서울에 이러고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가 심은 사꾸라 나무도 저렇게 피었으려니……동네가 온통 꽃투성이려니…….'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