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친명파로 이성계와
나흥유(羅興儒)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하였던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말한다.
조선 건국 후 태종 1403년(태종3)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정권(足利政權)도 책봉을 받아 조선·
Ⅰ.서론
14C 대외적 상황을 보면 북송과 남송시기에 서북방의 서하와 북방의 요ㆍ금ㆍ원은 이민족이 건립해 중국의 일부 혹은 번부를 지배했다. 요는 최초의 정복왕조로서 후대의 정복 왕조에 많은 영향을 준다. 금나라가 쇠퇴해가던 13세기 초엽에 이르러 동아시아는 몽고평원에 부족 단위로 유목
2)통신사 부활
앞서 말했듯이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만의 전쟁은 아니었다. 왜란의 이유가 일본측에서 명으로 가는 길을 트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은 이를 좌시할 수 없었고 조선에 군사를 보내 전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렇게 명이 조선 땅 위에서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만주지역에
2. 고지도 제작의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 고지도는 세계지도(천하도)·동아시아지도·전국도·도별도·군현도·관방도(關防圖) 등으로 구별할 수 있으나,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 지도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관찬지도(官撰地圖)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상기 지도의 출현 이후에도 그 성과를 흡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