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회수淮水에서 장강 중하류 유역에 걸쳐, 즉 현재의 강소․안휘의 두 성과 나아가 강서성 일대는 처음에는 양씨楊氏의 오왕조, 그 다음에는 이씨의 남당 영역이었다. 오왕조의 시조인 양행밀楊行密은 여주廬州[현 안휘성 合肥]사람으로 당 왕조 말기의 절도사 고병高騈의 반란에 편승하여 양
남당 한원진은 이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하였다. 두 학자는 인성과 물성이 과연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 미발의 심체는 과연 순선한 것이냐 악할 수도 있는 있느냐 등의 문제에 이르러 서로의 견해를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견해차는 점차 확대되어 호서지방의 학자들과 낙하지방의 학자들의 학문
남당 한원진 간 사상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단순히 당대의 상황만 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그 시발점을 알아보기 위해 기호학파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호학파는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공통의 목적을 지녔을 때와 달리 정
시가의 발전은 당대말년에 이르러서 고체시나 율시, 절구, 장편, 단편을 막론하고 모두 가장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후대에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작품을 지었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독창적인 작품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었다. 문학발전의 통례상 하나의 문체가 이 지경에 이르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