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남명 조식이라고 하면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사상, 교육관, 인간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어름어름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남명조식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뛰어난 유학자, 많은 의병 제자를 배출한다는 사실 정도였다.
남명 조식의 정치·사회적 의미,
1. 남명 조식
(1) 남명 조식의 생애
조식은 1501년(연산군7)~1572년(선조)의 사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 호는 남명, 생원안습의 증손으로, 승문원 판교 언형의 아들이다.
26세 이전까지 한양에 거주하였으며 기초학문 학습과 과거를 준비하였고 이후 산해정, 뇌룡정, 산천
남명 조식의 학문관
남명의 학문은 크게 博文約禮․下學上達․居敬集義(敬義夾持)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모두 실천궁행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거경집의는 성리학의 영향이 강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과의 차이점도 없지 않다. 그의 학문은 당시의 다른 어느 학자들보다도 원시유학에 접
남명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준 것은 없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
3. 남명 조식의 명망이 떨어지는 이유
앞에서 말했듯이, 나의 경우에는 조식선생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퇴계 이황이나 이율곡만큼의 위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단순한 예로, 어릴 적의 위인전에서 남명 조식의 책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대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나 율곡 이이 선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