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원총서』 1권 0호 ,(2006)
2.조식과 이황
16세기 중엽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조식과 이황이었으며, 유학계에서는 이들을 양대 종사宗師로 추앙했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1501)에 같은 영남에서 태어났으며, 낙동강을 사이로 조식은 우측(경
남명학연구원, 2011, p.101.
그럼에도 북인은 민생을 구하기 위해 은광(銀鑛)을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상업을 진흥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후금(後金)의 부상(浮上) 속에서 화기도감을 세워 화포를 개발하는 등의 국방 면에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吳洙彰, 「붕당정치의 전개와
남명학연구원, 2005.
(2)한비야
한비야는 유복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중학교 시절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형편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다양한 일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
남명학파(南冥學派)
남명학파는 남명(南冥)조식(曺植)과 그 문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이다. 이 학파는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조식은 학문이란 아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는 대체로 진주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김해, 밀양, 청도, 북쪽으로는 창녕, 현풍, 성주, 서쪽으로는 산청, 함양, 하동 및 남쪽으로는 사천, 고성 등지에 미쳤다. 남명 당시 경상도를 크게 네 개의 계수관으로 구분할 때 진주목 관내의 전 지역과 경주부 관내의 밀양, 청도,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