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학의 이데올로기화를 십자가 신학적으로 비판하면서, 이 접근을 십자가를 인식원리로 하면서 거기서 그 유비를 찾아내고자 한다.
2. 십자가적 통일신학의 출발점
십자가적 통일신학은 세계의 고통과 아픔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임재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쪽 교회만의 총회 구성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대회는 친일교단 잔존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c. 제 2회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1946. 4.30.~5.2.)
대회장을 김관식 목사에
교회는 불신의 감정을 벗어버리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협력을 다짐할 수 있었다.
2) 협력으로써의 선교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기로는 북한교회는 그 규모에서 남한교회에 비해 매우 작다. 예배당을 가진 교회는 봉수교회, 칠골교회 2개이며, 가정
재건되었고 12월에는 전북노회가 재건되었다.
통일의 여망 때문에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쪽 교회만의 총회 구성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대회는 친일교단 잔존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해방 후의 북한 교회
1. 김일성 정권의 대두(소련의 점령정책과 북한정권의 수립)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가 임박한 가운데 미․영․불․소의 4대 연합국은 포츠담에서 회담(1945. 7. 17~8. 2)을 갖고 전후 유럽문제의 해결과 소련군의 대일 참전에 따르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