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참전 당시 약 1만여명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
3. 명나라 수군의 합류
1) 명 수군의 참전 배경
-해상을 통한 일본 수군의 명(明)나라 직접 공격에 대한 걱정
-정유재란 이전에 수군의 파병을 결정한 상태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고 연이어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자 이를 실
1. 이순신 장군의 업적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은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장군이 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한 때 원균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옥중
Ⅰ.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 汝諧)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양력 4월 28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당시의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동쪽의 '마른내길' 근방이며, 그가 탄생한 집터는 현재의 인현동 1가 40
노량해전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病死들이었다. 그들이 주둔해 있던 곳에서 철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水師提督 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열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