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조사사업
일제는 우리나라 점령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으로 궁핍한 경제 상태를 유지시켜 제국주의적 약탈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토지조사사업'은 농촌에 있어서의 봉건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1910년 3월부터 1918년 10월, 약 9년이라는 시간과 2000
토지조사사업(1910년대)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30년대 전반),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급속한 공업화(1930년대 후반∼1940년대 전반)등이 행해졌다.
일제 식민지지배의 커다란 특징의 하나로서 '토지소유관계의 철저한 개혁'을 들었는데, 이는 농촌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식민지경제 내로 편입해 들
토지소유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흑자를 나타낸 반면 소작농은 3정보 이상 경작해야 흑자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비율은 소작농 호수의 9%에 지나지 않았다.
농가의 수지적자는 부채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에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소작농과 자소낙농을 합한 2,247,194호 중 77.2%에 해당하는
운동(洋務運動) 및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에 의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 로, 기존 집권층의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정책에
1. 머리말
근대 또는 근대성의 인식 문제는 한국 근대사의 핵심적인 연구테마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모토가 된 근대화는 어서 빨리 서양의 근대를 성취해야 한다는근대주의로 인식되면서 군사정권에 의해 민주화와 대립적 개념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서양의 근대를 절대적인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