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그들에 움직임은 그로 인해 남는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다다는 미래주의와 함께 20세기 초반 가장 강력한 문예 운동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미래주의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과 과학기술을 높이 사는 것과는 틀리게 이에 부정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미래주의가 전쟁을
부정하는 반 예술이 아닌 개성과 창조를 신성시하는 근대적 예술관의 반항으로서의 반 예술을 표현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의미의 작업 대신에 정신활동을 중요시하여 새로운 미술개념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전형적인 시각미술
부정하는 파괴적 허무주의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다다이즘(dadaism)을 탄생시켰고, 다다의 정신은 전위예술(avant gard)로 계승되어 60년대에는 팝 아트로, 70년대에는 펑크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예술사조를 수용하는 사회적 상황은 도시화 현상으로 형성된 하위문화 집단들에 의해 그들의 좌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다다이즘은 여러 의미에서 예술의 한계를 타파하고 단순한 물체도 행동도 하나의 관념으로 일관할 때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여기에서 칸딘스키의 '정신의 3각형'은 역전하여 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