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어느 시대든 정치적·사회적으로 새로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라면 나름대로의 고뇌와 책임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말여초’의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펼 기회조차 없었던 최
악무조(樂舞條)에 의하면 최표의 『고금주(古今注)』에 기록된 이 노래의 배경설화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공후인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涇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들
당대 자료를 대상으로 하였다.
고려속요의 양에 있어서도 현존자료에 비해 많은 양을 갖고 있으며 현존자료와 다른 많 은 부전자료를 접할 수 있다. 삼국속악을 제외하고 3편의 속악정재와 29편의 속악(경기체 가인 한림별곡도 포함)이 있다.
2. 내용
고려의 악무는 아악·당악·속악(향악)으로 나누어
당대 사람인 박준이 편찬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악장가사》에 수록 된 작품 가운에 몇 작품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품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하였다. 사실 그의 언급은 추정에 불과했으나 이후 《악장가사》를 이해하는 데 지표가 되었다. 그를 통해 지금까지도 우리는 《악장가사》의 편찬
당대의 학자들이 찬술과 교정을 보았다 했으니 악지는 신중하게 서술되었다고 판단된다. 악지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악(樂)을 정의하고 있다. 당대 사대부들의 관점에서 효용성을 우선하여 음악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풍화(風化)를 수립하고 공덕(功德)을 본받게 하는 것.” 《고려사》권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