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풍 일변도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와선 만당을 극복하고 조선적인 당풍과 새로운 송시가 등장하였다가, 17세기 후반엔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풍이 개진되어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시가 등장하게 된다.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의 시풍은 조선풍의 시, 악부류의
1.우리나라의 당시풍(唐時風)
조선조 한시문학사에서 당시풍 시인에 대한 분류는 그 관점에 따라 학자마다 그 견해가 다양하다. 이는 고려중엽이후부터 16세기 이전까지 당시풍이 미미하게 명맥만 유지해왔고 당시풍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간의 논의를 바탕으로 당시풍 한시를
당시풍(唐詩風)이 시단을 풍미하였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 17세기 초에는 명대(明代)의 진한고문풍(秦漢古文風)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 풍조 역시 당송고문론(唐宋古文論)이 제기되면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주로 노론계(老論系) 문인들에 의해 당시(唐詩)는 물론 송시(宋詩)도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사장파는 서거정, 성렬, 남곤, 도학파는 길재, 김종직, 조광조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선조 무렵에 송시풍에서 당시풍으로 일대 전환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대표작품 : 福靈寺 - 朴誾
伽藍却是新羅舊 절간은 바로 신라 적부터 묵은 것이요,
千佛皆從西竺來 천 개 부처는 서쪽 천축에서 왔도다.
당시풍(唐詩風) 이 유행하고 명(明) 나라의 왕세정(王世貞) 등의 의고주의(擬古主義)가 성행하여 수많은 대가들이 배출되던 때였다. 이가원, 『한국한문학사』, 보성문화사, 1981, p216.
즉 어느 때보다도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 넘쳐나고 한시가 유행하던 시대에 임제의 시문(詩文)활동이 이루어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