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영에서는 이미 위기의식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모슬포에는 레이더기지가 설치되고 중국대륙과 일본본토폭격에 대비하는 등 제주섬의 상황 역시 긴박하게 전개된다. 일본군 병력은 1945년 3월 약 2만명에서 6월에는 약 6만 5천명으로, 8월 해방 직전에는 3개 사단 및 1개 여단 약 7만5천명으
대본영.참모부.군사참의회.회계감사원을 두도록 하였다. 4개의 직할 기관 중 3개가 군사기구로 되어 있어 군사 업무가 중시되고 있다. 대본영은 ‘임시대통령을 원수로 한 군사의 최고 통솔부’로 하였고 막료 및 기관의 고등부를 두도록 하였는데, 국무총리와 참모총장은 막료의 主幹이 되어 군사 작
대본영을 조직하고 정부의 대원수로 복귀하자, 장개석은 대본영 참모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 뒤 손문에 그에게 중국 국민당 군사 부문의 중임을 잇달아 맡김으로써 당내에서 그의 위상은 빠르게 상승하였다.
당시는 국공합작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소련 원조에 따른 단군의 건립도 약속되어 있었다.
대본영지하 참호를 비롯하여, 일본국내의 거대 지하 참호의 계획건설이 시작된 다음 11월에 제주도에 제408 특설경비 공병대가 배치되어, 비행장복구축성에 협력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육군도 3월에 소형정 비밀시설 건설을 지시해 있었고, 제주도에서도 5월에 상륙정을 은닉할 공사를 개시했다.
1945년
대본영이 바라본 제주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고 당시에 건너온 일본 군인들이 제주 징용노무자들에게 ‘황군이 살아야 도민도 산다’고 독려한 일화는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 제주에 대한 일본의 인식과 오늘의 인식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