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매일신보 속 광고주의 국적 비중
한글판대한매일신보가 191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광고에 등장한 광고주의 국적은 한국이 91.3%이었고,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외국이 나머지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한글판신보에 등장한 대부분의 광고주의 국적은 한국이었다. 국채보상운동과 한글판신보가 지
신보> (1904. 4. 18. 발행)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한국인 발행의 친일지로는 <국민신보> (1906. 1. 6. 발행) <대한신문> (1907. 7. 18. 발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영국인 E.T.베셀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진영을 대변하는 논조를 폈다. 이 신문은 국한문판·한글판 및 영
매일신보>만 남게 되었다.
3) 미군정 시기의 신문
1945년 광복이 되자 신문업계가 가장 먼저 활기를 되찾았다. 미군정은 완전한 언론 자유를 약속하며 신문 발행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신문이 창간되었다.서울에서 한글판신문 <조선인민보>가 먼저 창간됐으며, 지방에서
광고도 여자 4명의 대화를 통해 상품을 알리고 있다.
<매일신보 1911.8.29/1911.9.8>
한성주보
한성주보는?
1886년(고종 23) 1월 박문국(博文局)에서 발간한 조선정부의 관보. 갑신정변 후 1885년 5월 박문국의 중건과 신문발간 준비가 다시 시작되었고,〈한성순보>를 다시 복간하는 형태로 1886년 1월 2
1. 외국의 신문의 역사
사회적인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한 신문 유사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BC 5세기 무렵 로마에서 지방근무자에게 뉴스를 보내기 위하여 손으로 직접 쓴 뉴스레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 BC 60년 로마 집정관 J.카이사르는 정부발표사항을 일보형식으로 게시하는 '악타 디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