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도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당시의 혼란한 정치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시에서 밝힌 바와 같이 ‘本性愛岳山, 質性自然’의 성격을 좇아, 자연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분 시인들은 혹시 남들이 자신의 시를 쉽게 알아볼까 두려워 시를 어렵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도연명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비통한 심정을 ‘재주를 품었으되, 그 재주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라는 의미의 ‘회재불우(懷材不遇)’로 표현하기도 했다. 불우했던 숱한 지식인들은 난세의 간웅(奸雄)에게 기대어 미처 피어나지도 못할 재능을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도연명은
도연명)陶潛(도잠)
‘潛’- 陶淵明 자신의 심정, 당시 방황하던 사회의 분위기 상징
陶淵明의 생애
陶淵明(365~427) – 이름은 潛이고 자는 元亮(원량)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