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그들의 활로와 안식처를 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현학청담사상이 성행하고, 은일사상이 유행했다. 도연명도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당시의 혼란한 정치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시에서 밝힌 바와 같이 ‘本性愛岳山, 質性自然’의 성격을 좇아, 자연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생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개원 24년(736)의 장구령 파면과 이임보 기용, 天寶 3년(744)의 양귀비 책봉, 천보 11년(752)의 楊國忠 등용 등의 실정은 결국 天寶 14년(755) ‘安祿山의 난’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현종 재위 후기의 혼란한 시대적 배경은 왕유의 삶과 궤를 같이하며 그의 시에도 큰 영향을
전원시라고 하기보다는 목가시라고 하기도 한다. 동양의 경우는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같은 작품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작품에서도 도연명의 세사를 벗어나 즐기는 생활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권정은, 『자연시조: 자연미의 실현 양상』, 도서출판 보고사, 20
공자의 ‘곤궁에 굳센 절개’, 노자의 ‘지족’, 장자의 ‘곤궁과 영달의 초월’
등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인생철학으로 삼음
▶ ‘귀거래사’와 함께 도연명이 장기적으로 전원생활을 하면서 순박한 농부들의 생활을 찬미하고 벼슬에 대해 비난한 작품
▶ 총 여섯 편으로 이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