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청년회 간사 박희도의 사랑방이었다. 박희도와 오화영 목사를 비롯하여 이곳에 모였던 정춘수 목사, 오기선, 신흥식 목사는 의기투합하여 다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구체적 방안으로 경향에 기독교인 동지를 구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Ⅰ. 서론
기존의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임시정부는 매우 중요시하게 여겨져 온 연구대상이었다. 광복 이후 당시 시대를 주도하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 진영에 의하여 분열된 한국사의 특수성은 각각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서 독립운동사를 활용해야 했다. 여기서 남한
독립을 청원하는 1만명 서명부를 만들어 보내려는 노력도 시도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오랜 지속과 1917년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이 연합국 편에 섬으로 인해 전세는 결정적으로 동맹국쪽에 불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승전을 전제로 이루어지던 독립운동의 계획은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Ⅱ. 주요 독립운동 업적
2.1. 위임통치청원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천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즉 청원외교다.
청원외교
유럽
파리평화회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국제연맹에는 한국문제를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줄 수 있는 미국이나 소련이 가담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고 평화를 보장할만한 실효성 있는 기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활동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