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들의 제일 목표였던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성공했으나, 미-소에 의한 분단 주둔은 이후 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폭발하는 배경이 된다.
‘냉전’이라는 두 글자만큼 광복 이후의 국제정세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은 각 개별 국가
독립투사들의 제일 목표였던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성공했으나, 미-소에 의한 분단 주둔은 이후 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폭발하는 배경이 된다.
‘냉전’이라는 두 글자만큼 광복 이후의 국제정세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은 각 개별 국가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만주와 연해주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이후 만주, 연해주, 미국 등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물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또 꾸준히 독립투사들을 키워냈다. 물론 국내에서도 비밀 결사들의 활동도 있었기에 1920년 홍
독립투사라는 것을 주장한다 해도 김일성이 분단을 조장한 것과 6.25의 책임을 면하게 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것은 큰 오해이다.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이후의 역사에서 그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분단이 낳은 왜곡된 반공 교육과 북한에서의 부풀려진
과거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다. 김일성도 그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었지만 그는 후일 한반도의 반을 통치하였으며 사상공작이나 세뇌의 방법을 동원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그 인민들로부터 칭송받는 인민들의 제일가는 영웅이 되었다.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당시 쟁쟁한 인물들과의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