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부사까지 오른 인물로 시호가 장간공(章簡公)이며 연암을 직접 임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친 인자한 조부였다.
연암은 어려서 부모와 떨어져서 15년 연상인 큰 형 박희원(朴喜源; 1722~1767) 내외 밑에서 자랐으며 5세부터는 할아버지가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해가자 따라 다니면서 훈도와 초학 공부
동녕부에 속했다가 1290년 회복되었으며 조선 태조 때에 풍해도라고 했다. 1895년 도를 폐지하고 23부로 개편하면서 해주부에 속했다가, 1896년 13도 개편 때 다시 황해도가 되었다. 1945년 8·15해방 당시의 행정구역은 해주시·사리원시·송림시와 벽성군·옹진군·장연군·송화군·은율군·안악군·신천군·재
동녕부사까지 오른 인물로 연암을 직접 임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다. 그는 자라면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지내면서 실학에 몰두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늦은 나이에 선공감감역을 시작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고 69세 때인 1805년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 재동 자택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명나라 역시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가 1388년 2월이었다.
(고려 후기 시대적 배경)
1. 대외적 - 원의 간섭 (자주성의 시련)
① 일본정벌에 동원 : 인적, 물적 자원 동원
② 영토의 소실 : 고종 말년에 화주 (영흥)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였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