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창시는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19세기 후반의 사회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은
동도서기파로 이양되었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장차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아 국가를 혁신하고, 서울 도시구조를 경운궁 중심축으로 하여 새롭게 개편한다는 원대한 구상도 담겨 있었다.
고종은 1879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사이 왕후의 국장을 2년 2개월이나 연기하면서
동도서기파와 급진개화파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특히 국가 재정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대립은 극에 이르렀다. 민씨정권을 대변하는 재정고문 뮐렌도르프는 惡貨를 주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도서기파)으로 구분한다. 급진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 박영효이며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김윤식, 유길준이 있다. 한국철학사연구회,『한국철학사상사』(한울,1997). p.345
의 수장격인 인물이었다. 그는 1884년 개화파의 일원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청국 군대에 밀려나서 일본
동도서기파)으로 구분한다. 급진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 박영효이며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김윤식, 유길준이 있다. 한국철학사연구회,『한국철학사상사』(한울,1997). p.345
의 수장격인 인물이었다. 그는 1884년 개화파의 일원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청국 군대에 밀려나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