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관(同文館: 최초의 신식학당)에 천문관(天文館)과 산학관(算學館)을 증설하여 과거 출신자들을 선발 입학시켰다. 이 일에 대하여 문연각(文淵閣) 대학사 왜인(倭人)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 인재가 없지 않은데 "하필이면 서양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단 말인가"라고 주장하였
동문관을 설치하고 유학시킨 것은 서양의 문물이 우월함을 승인한 것이었다. 2천 년 동안의 ‘천하’ 관념이 근본적으로 동요됨으로써 현대국가의 사상이 나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양이 제국주의적으로 침략한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간접적으로 구악을 제거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영환지략을 서술했다. 양무운동 시기의 동문관의 교과서였다.
등의 양무서(洋務書)를 읽으면서 바깥사정에 귀를 기울였고, 서양인 선교관과 고문관을 통해 서기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나름의 문명수용의 과정을 거쳐 군주가 직접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여러 차례의 보고를 통
동문관(北京同文館)을 설립하였으며, 계속하여 외국어학교, 군사학교, 기술학교 등과 같은 몇몇 신식학교도 속속 개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청정부에서는 국외로 유학생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무술변법(戊戌變法)”중에 강유의, 양계초, 담사동, 엄복 등의 유신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