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지도자들은 삼정문란의 궁극적 책임이 지방관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집권충에 있음을 지적하게 되었고, 여기서 농민전쟁은 이전의 민란의 한계였던 국지성을 벗어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 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되었다. 농민전쟁을 지도한 것은 호남지역의 동학조직을
1. 동학사상
동학사상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강렬한 민족주의와 당시 백성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진 대외관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동학의 서학과 서세에 대한 관점을 보면, 서양을 위정척사상처럼 무조건 사학으로 보거나 기기음교에 의존한 금수와 같은 세력으로 경멸하지 않고, 도리어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봉건모순과 민족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봉건모순은 정치기강의 문란, 사회신분문제, 조세제도의 문란, 토지제도의 문란 등이었고, 민족모순은 외국 상인의 침투와 이들의 국내 유통기구 장악으로 인한 경제파탄
갔다.
그러한 민중들의 불만은 종종 민란의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홍경래의 난(1811),진주민란(1862)
등은 그 대표적 예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민란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 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침략적이고 반외세적이며 민중적인 종교인 동학이 대두하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