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으로 재평가 받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면 1, 2, 3 차 교조신원운동을 바탕으로 고부봉기를 일으켜 전주입성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의 전진적 승리의 단계인 제 1차기병과 전주화약을 통하여 동학농민군이 지방통치를 이루는 단계,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여 공주전
갔다.
그러한 민중들의 불만은 종종 민란의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홍경래의 난(1811),진주민란(1862)
등은 그 대표적 예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민란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 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침략적이고 반외세적이며 민중적인 종교인 동학이 대두하였 다.
동학농민군을 편성하였고 전주에 입성한 단계로 5월 8일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이 제 1차 농민전쟁 단계로부터 본격적 농민혁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제 3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농민집강소의 단계로 청군과 일본군이 갑오농민전쟁에 개입하자 이 두 나라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하여 농민군과 관군
동학농민군세력에 결집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정치기강의 문란과 사회적 불안은 한편 민중의 동요를 가져와, 그것은 결과적으로 화적의 횡행과 민란의 재연으로 나타났는데, 삼남 일대에서 가장 심하였고 나아가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연결되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도 침략의 위협이 다가
전남지방은 예로부터 예향이라 불리어 왔다. 동편제 창, 남도 서화 등은 우리나라 예술을 대표해 왔으며, 조선 중기에는 담양에서 송강문학, 해남에서 고산문학이 단가의 꽃을 피우게 하였던 고장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 행사로는 대표적인 문화예술행사인 남도문화제, 지리산의 약수제와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