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봉건모순과 민족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봉건모순은 정치기강의 문란, 사회신분문제, 조세제도의 문란, 토지제도의 문란 등이었고, 민족모순은 외국 상인의 침투와 이들의 국내 유통기구 장악으로 인한 경제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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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학은 2대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봉건적 압제와 착취 그리고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는 농민대중 속에 광범위하게 침투하여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였다. 그리하여 지방 분산적이었고 일시적인 농민대중의 저항을 결집시켜 전국적인 혁명으로 성숙시켜갔다.
농민전쟁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소민란 또는 소폭동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제 2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제 1차 농민혁명의 단계이다. 1894년 음력 3월 20일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茂長(무장)에 남접도소를 설치하고 봉기를 준비하여 약 4천명의 동학농민군을 편성하였고 전주에 입성한 단계
Ⅰ. 서론
우리나라의 전근대사회는 농업사회였다. 그러므로 농민은 우리나라의 주된 생산자였다. 이 같은 농민은 신분에 있어서는 양인(평민)과 노비(천민)이었다. 고구려의 피지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공부·역역을 부담하였다. 세는 인두를 기준으로 베 5필을 징수
한국 근․현대의 출발을 봉건체제의 타파와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면 1894년은 그러한 전환기에 처해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후의 한국 근․현대사는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해결을 시대적 과제로 삼았고 1894년은 그 출발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894년 농민 전쟁은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