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세기의 사회상
(1) 정치적 상황
정치적으로 가장 문란하였던 것은 인사행정이었다. 과거제도의 경우를 보면 문벌 ․ 당쟁 ․ 매관매직에 좌우되는 등 관직의 수요와는 무관하게 무계획적으로 허다한 명목을 붙여 과거를 시행하였다. 즉 과다한 관리후보자를 선출함으로써 당쟁을 유발하였
농민생활과 서울의 하층민의 경제적 압박이 가중되자 이들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조선에서는 현재까지의 개화정책보다 조금 급진적인 개혁을 꿈꾸는 움직임과 함께 심화되는 민생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년도
특수한 평등사상으로서의 ‘대동’의 이념에 입각하여 토지를 공유로 하고 남녀 균등히 할당하며 전체 잉여물자를 공유로 하여 노유고과를 부양하는 등 차별과 대립이 없는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며, 거병 이후 군대 내에서 실행해 왔던 것을 사회 일반에게 적용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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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사상의 연원은 이용후생을 주장하던 북학사상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 및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