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 나라 안에서도 적용되었다. 즉, 영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하여 영국 국가와 일부 공장주에게만 혁명의 열매를 돌려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배고픔에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질렀다. 예를 들어, 빵을 훔친다고 하는 경범죄 말이
호주로 왔던 영국인들이 탔던 배를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현재 어보리진들이 할 일이 없어서 길거리에 나앉은 모습이다. 어보리진들에 대한 대우가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사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영국 신문 2004년 2월 21일자 기사이다. 시드니(Sydney) 인근의 애버리진 거주 구역 레드펀(Redfern
영국과 원주민인 마오리족간의 공식적인 관계는 1840년 와이탕이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조약은 마오리 족의 주권자인 약 500명의 추장들과 유럽인들을 대표한 영국 왕실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마오리족은 입법권을 영국왕에게 양도하고 대신 마오리인들은 그들의
호주의 과거 인종정책
1776년 미국독립혁명이 발발하여 그때까지 미국으로 보내고 있던 죄수를 처리하지 못하게 된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새로운 유형식민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1813년 시드니 서쪽 블루산맥 너머에 광활하고 기름진 들판이 발견되었고, 그 해부터 양모의 생산을 중심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에 진출하여 1769년 이후 10년간 3차례에 걸쳐 영국의 쿡이 남태평양을 탐험하였다. 쿡의 항해를 계기로 유럽 여러 나라들은 학술조사의 색채가 짙은 탐험을 주로 하였다. 동시에 태평양 제도에 대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점차 여러 섬에 대한 영유화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