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민족의 개별성을 주장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족주의나 민족 자결주의에 맞서기 위해, 일제는 민족의 개별성보다도 각 민족이 협력해서 하나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협화’를 제기했던 것이다. 민족협화는 만주청년연맹의 강령 가운데서 만주국 경영자들이 채택한 가장 중요한 부
I. 들어가며
1. 한국, 중국, 일본이 본 만주국만주국 중국은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이 이 곳을 중국에서의 분리를 위해 사용했던 만주(Manchuria)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뚱베이(東北)이라고 부른다.
은 만주 지방에 일제가 지난 30년대 초에 세우고,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일 전쟁의 기간 동안 중
, 그리고 이후 그들이 대안으로 선택했던 만주국행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 보는 것은 식민지 당시 한국인의 세계인식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오늘날의 친일잔재 청산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주국이라는 배경을 토대로 활약했던 친일 인사들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이들의 존재는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대부분 근대한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 인물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선정하게 되었다. 이들을 속히 만주국 친일파라 명명하겠는데, 이들에 대한 이해는 과
만주국은 자발적 독립이 아닌 일본에
의해 건국 되었다고 결론 지었다.
일본은 보고서 심사과정에서 강력히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933년 국제연맹 총회에서 릿튼 보고
서의 채택과 만주국의 불승인. 일본군의 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안이 채택되자 일본대표는 반
대성명을 발표하고 퇴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