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말
일찍이 구소련의 몇몇 학자들은 중국 동북 지구의 원래 거주민은 고아시아족이며 대개 지금부터 6000년 전에 퉁구스족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상 아직까지 기원전 6000-7000년 전부터 1만년 전가지 사이의 유적은 찾지 못하고 있다.
상기한 이론을 김정배가 받아들여 한
말갈과 거란, 백제 등을 정벌한 광개토태왕이 어째서 후연과 바로 싸우지 않고 조공을 먼저 했는지를 고려하면, 후연과 싸우기 전 고구려의 영토가 후연보다 적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를 대싱안링 산맥까지 줄이는 학자들도 있다. 그 때, 후연의 영토는 후한 말 13주 중, 황하의 이북(하
말갈에 이르니 동서가 3천1백리, 남북이 2천리에 이르렀다.
관제를 살펴보면, 가장 높은 자리를 대대로大對盧라 불렀는데 이는 당나라 관제의 1품에 비견되며,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했는데 3년에 한 번 교체하였지만 만약 그 직무를 수행함이 뛰어나면 기간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교체하는 날
말갈제부를 복속시키는 등 급속한 세력확장에 성공하게 된다.
발해의 건국 자체가 반당적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은 발해 건국 7년만인 705년 중종이 즉위하자마자 장행급을 보내어 발해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당측에서 본다면 측천무후의 실정으로 발발한 거란의 이반, 발해의 건국,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런 시기에 발해의 중앙정부는 강력한 요나라의 등장으로 국가 존립이 위험에 처하자,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고려와 정략적 혼인을 하는등 외교적으로 노력을 하지만 막상 요의 침공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919년 요나라는 발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