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제부를 복속시키는 등 급속한 세력확장에 성공하게 된다.
발해의 건국 자체가 반당적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은 발해 건국 7년만인 705년 중종이 즉위하자마자 장행급을 보내어 발해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당측에서 본다면 측천무후의 실정으로 발발한 거란의 이반, 발해의 건국,
다) 마한 사회의 지배 세력
마한의 정치적 성격을 생각할 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마한을 구성한 기본단위는 소국이었다는 점이다. 이 소국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립 시기나 성립주체를 달리 하면서 각처에 산재하여 있었고 이들은 맹주세력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말갈과 거란, 백제 등을 정벌한 광개토태왕이 어째서 후연과 바로 싸우지 않고 조공을 먼저 했는지를 고려하면, 후연과 싸우기 전 고구려의 영토가 후연보다 적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를 대싱안링 산맥까지 줄이는 학자들도 있다. 그 때, 후연의 영토는 후한 말 13주 중, 황하의 이북(하
< 삼국의 신분구조 >
<삼국의 사회․경제적 신분구조>
고구려와 삼한 지역에 있었던 읍락사회는 농경 정착생활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사적소유제가 확립되고 계급과 계층 그리고 신분이 형성되어 가는 양상을 보였다. 읍락들은 상호간에 경쟁하기도 하였으나 중국세력 및 주위 여태 동이족
말갈에 이르니 동서가 3천1백리, 남북이 2천리에 이르렀다.
관제를 살펴보면, 가장 높은 자리를 대대로大對盧라 불렀는데 이는 당나라 관제의 1품에 비견되며,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했는데 3년에 한 번 교체하였지만 만약 그 직무를 수행함이 뛰어나면 기간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교체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