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르메가 상징시의 이론을 갖고 후대에 영향을 준 것에 비해 그는 그 시대의 젊은 시인에게 힘을 주고 수사법에 있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생애>
베를렌느의 일생은 술과 여자와 남색으로 보내고 기도와 악과 한탄, 반역에 흔들리면서 시신을 따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시청직원으로 취직하여
상징주의 및 시론은 이미 19세기 중엽 보들레에르에게서 그 일면이 완벽한 형태로 작품화되었고, 또 의식적으로 명확히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문학 운동의 형태로, 프랑스 문학사상 한 시기의 지배적인 사조로 형성된 것은 19세기 말엽 약 20년간의 일이자. 상징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적인
말라르메 등을 알게 된 일은 그의 생애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때 이미 시를 쓰고 있었고 이 시들은 당시 전위적인 문예지에 발표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892년 10월의 어느 날 밤, 그는 어느 폭풍우가 쏟아지던 밤에 정서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일체의 문학이나 시작을
1. 상징주의의 발단
프랑스 시단(詩檀)에서 일어난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1885년부터 나타난 화가․조각들의 태도 혹은 다소 느슨하게 조직된 운동의 한 경향을 뜻한다.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으며, 쿠르베에 의해 공식화된 ‘사실주의의 원리’에 반발하였
'현대성(modernit )'이라는 어휘와 개념은 보들레르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레몽(Marcel Raymond)은 보들레르에게서 출발하여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현대시의 연결문제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제시한다. 레몽뿐 아니라 보들레르의 동시대 문학인들로부터 오늘의 문학인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