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중국의 역사중에서 16,7세기 명말청초의 시기는 여러 가지면에서 혼란과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그런데 앞으로 다룰 李 贄라는 인물이 바로 이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동안 이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어느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알 것이라는 생각이
명대부터 청대의 산동 일대 인구 이동을 추적해 보았고. 대외교류의 측면에서는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한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특히 가장 교류가 활발했고 이후 교류의 전형적인 상이 마련된 시기라 볼 수 있는 당대를 살펴봄으로써 산동을 중심으로 하는 대외교류의 일면을 밝혀보고자 한
명은 북쪽으로는 몽고족의 침입과 남쪽으로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16세기 말명의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고 결국 17세기 중엽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 주었다.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 국가들이 여전히 번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서아시아, 아프리
명의 도움을 받아 임진왜란을 극복했고, 광해군의 즉위, '심하전투'의 참전과 패전, 인조반정 등 일련의 숨가쁘게 전개되던 17세기 초의 파란과 격동을 '중화적 세계질서' 속에서 겪어왔던 조선에게 '오랑캐 왕조'인 청의 등장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조선이 그 같은 사상적 입장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연합군은 후금군에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광해군은 명의 원군 요청을 적절히 거절하며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