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명종 1)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의
소윤
윤임 일파의
대윤
경원대군(명
종)의 외숙인
윤원형 일파
의 소윤파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
일파의 대윤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
싼 대립
윤임 일파의
몰락과 연루
된 사림이
죽거나 유배
외척간의 대
립이 정쟁으
로 표면화
<출처
사건으로 명종대 이후 1백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의 시초가 된다.
흔히 무신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정중부(鄭仲夫)로 이해되어 왔다.《高麗史》에 무신란이 정중부의 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무리가 아니다. 정중부는 의종의 신임을 얻어 궁궐의 복문을 통해 왕궁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였다.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
농암의 시가를 이상과 같이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시가사적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첫째,우리말로 된 시가의 창작시기가 그의 치사 이후인 노경에 들어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중년 이후 그는 귀거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여의치 못하고 76세에 귀향하면서부터 주로 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