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일본서기는 윤색된 부분이 많고 연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료로서의 신뢰성이 적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학자 대부분에게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그런데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발견된 묘지석의 내용이 일본서기의 내용과 일치하여 일본서기가 사료로써 재조명되었고, 무령왕의 출생과 그의
Ⅰ.서설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은 백제 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서 발견당시 전혀 도굴되지 않고 매장당시의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의 무덤 중 유일하게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으로서 이의 발굴은 당시의 국사학에서 뿐만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크나큰 의
왕력에 대한 논란 중에서 가장 흔히 알려진 개로왕~무령왕까지의 계보(이하 개-무 혈연관계)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줄만한 『삼국사기』는 수직적으로 처리하고 있고 오히려 『일본서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 간단히 고찰해보기로 한다. 다만 『일본서기』속, 백제에 대한 기록은
Ⅰ. 백제의 무령왕릉
1. 무령왕릉
1971년 7월 공주의 송산리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108종류 1,90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이 왕과 왕비임을 알려주는 문자가 새겨진 소위 지석 2장이다.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 무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무령왕릉
백제 멸망 후 8백여년이 지난 15 세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공주의 왕릉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공주에는 두 곳에 왕릉이 있으며, 하나가 시내로부터 서쪽 3리에, 다른 하나가 동쪽 5리 능현(陵峴)에 있다" 고 되어 있다.
이들 기록 중 앞쪽의 "서쪽 3리 지점"에서 1971년 7월에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