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이의 생애
1. 가계
이이(李珥)의 본관은 덕수(德水)로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롤 한다. 이돈수는 최충헌이 집권하던 고려 고정 5년에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서북면 원수인 조충(趙沖)의 부하로써 함께 싸워 무찌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1대조 양준(陽俊)도
문묘, 명륜당, 동․서재, 책을 발간하는 정록청, 성균관의 전곡출납을 담당하여 학생들의 생 필품을 공급하는 양현고, 식당 등 모두 96칸에 이르는 기본 건물이 갖추어짐. 이어서 문묘종사 의 일을 담당하는 전사청, 도서관인 존경각 등이 더 지어짐
* 연산군 때 성균관이 왕의 연회 장소로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때 학문적으로도 크게 인정받았다. 이색은 정몽주를 ‘우리 나라 이학의 조종’ 이라고 까지 호평하였는데 이는 후에 조선 사림파들이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주장할 때도 주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문묘종사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사림정치시대
사림세력의 끊임없는 당쟁은 일제 치하 식민지 시절, 일본의 대 조선 식민통치를 정당화시켜주는 역사적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당시 식민사관과 일제 어용학자들은 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선 당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