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채와 한원진 등의 논변이 비교적 꼽을 만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황의 경우처럼 치양지성에 대해서 논란을 않거나 비판을 하더라도 논증이 절실하지 못하였다. 치양지설은 후일 정약용에 이르러 크게 비판을 받는다. 정약용은 ‘양(良)’이란 천연적이고 본래적이라는 의미이며 ‘치(致)’란
박세채, 조헌, 김집, 김인후 등)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내삼문이 있는데, 이 내삼문은 제향 공간의 정문으로, 향교에서는 대성전 앞에 위치해있으며 관아에서는 동헌이나 객사 앞에 설치되어 각 문마다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운데 문은 수령과 사신, 빈객들, 왼쪽 문
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
율곡 이이 평전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이자 위대한 스승
■ 율곡은 어떤 인물인가
◎율곡의 위대함
5000권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 10만 양병설, 퇴계 이황, 기호학파, 신사임당, 자운서원, 동국 18명현, 제자/후학(조헌, 김인후, 김장생, 깁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성학집요 등
자기 시
박세채의 서당 설립과 운영은 당시 집권세력들의 향촌기지 구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에도 사족이 연합하여 서당이 설립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서당 설립과 운영은 다음 18세기적 양상과 같이 혈연 위주의 폐쇄적인 양상이 대종을 이루지는 않았다. 다수의 씨족이 몇 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