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들이 대대적으로 월남하였다.
북한의 친일파 숙청은 1946년 3월 들어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일제 잔재 청산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조선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20개조 정강>을 발표하면서부터는 “법률과 재판기관” 등 일본 통치기구의 청산으로 확대되었다.
북한의 일제잔재
일본 안에서 근대 사학이 발전하였다고 하여 국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구가 완전히 타파된 것은 아니었다. 에도 시대 국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주장을 일제는 한국 병탄을 합리화하는 이념으로서 내세웠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직후에 일본의 학술지 역사지리에서는 당시 일본의 역사 학자 대부
올렸고, 장석주는 무력으로 만세를 소탕하라고 핏대를 올렸다. 김종한은 원래가 조선인은 "청국의 속국으로 독립 혹은 공화"라는 말조차도 몰랐는데, 청일전쟁 때 일본이 "독립국으로 이왕에게 황제를 호칭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독립' 두 자를 알고 이번의 소요 사건"을 일으켰다고 투덜댔다.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
친일파는 1930년대 이후 일제통치에 직접 참여하여 제 도포를 억압하고 착취하던 조선인 식민관료, 만주와 중국에서 항일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만주군), 나라 안팎의 항일 운동가를 염탐하던, 밀정일제 경찰을 대신하여 고문을 일삼던 조선인 악질 경찰, 항일운동가를 일제의 법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