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금, 방의석 등 의 악질 친일파들과 일본 정계의 인사들이 선임)
1945년 대화동맹 심의원 임명
1949년 반민특위에 제 1호로 구속
1950년 6.25 전쟁 직전 석방
1956년 화신백화점 설립
1973년 일본 소니사와 합작한 화신산업이 부도
1988년 사망
이외에도 그는 (주)경성방직, (주)동광생사, (주)조선평안철도, (주
박춘금’이 일본 중의원에 당선돼 일본제국을 홍보하였다.
광복~6.25전쟁: 광복이 되면서 140만 명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영왕 이은)는 입국하지 못했다. 이후 제주 4.3사건과 6.25 전쟁 당시 일부 한국인이 일본으로 밀입국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 1959년부터
…학생 여러분의 힘을 빌어 실행한지 무릇4회에 … 5천7백52명에 9만8천5백93명의 문맹을 타파하였다.(「동아일보」,1934년 9월 22일자 ‘문맹전선에서 전전삼월 삼천용사 당당개선’)
1930년대 가장 활발했던 야학운동으로 꼽히는 ‘브나로드 운동’을 평가하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브나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조선民내에서의 자발적 형성
일제는 동화주의 라는 식민지배 명분론을 선전하기 위하여 친일세력을 육성하고 이용하였다. 식민지배에서 무력적인 억압이 즉각적인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민족을 분열시키고, 또한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집단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였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가 문제
서론
독립 이후 현대 한국에서 식민지 역사를 바라보는 주된 관점은 ‘수탈’에만 맞추어져 왔다. 이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철저히 수탈과 착취의 역사라는 데에 무게가 실린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식민지 지배를 당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