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박태원의 출생과 생애
박태원은 1910년 1월6일에 서울 수중박골(京城府 茶屋町 七番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성이고 고려 충선왕 때 밀성군으로 봉임된 척의 이십오대 손이다 조선총독부 보관본인 밀성 박씨세보에 의하면 증조 박승진은 장사랑, 조부 박두병은 삼서관을 지냈으며, 부친 박용환
박태원을 흔히 모더니스트라고 부르고 있다. 탁월한 언어감각, 참신한 영상기법, 세련된 도시감각 등, 더구나 “문예감상이란,(늘 하는 말이지만) 구경 문장의 감상이다”9 )라고 단언하는 그의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도록 한다.
1930년대부터 모더니즘 소설을 중심으로 활발한
박태원을 흔히 모더니스트라고 부르고 있다. 탁월한 언어감각, 참신한 영상기법, 세련된 도시감각 등, 더구나 “문예감상이란,(늘 하는 말이지만) 구경 문장의 감상이다”9 )라고 단언하는 그의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도록 한다.
1930년대부터 모더니즘 소설을 중심으로 활발한
기법과 형식이 새롭게 시도되기 시작하였으며, 박태원, 이상의 실험적 소설으로 인한 다양한 작품활동이 전개되어 작품의 모든면에서 괄목할만한 성과가 이루어져 그에 따른 여러가지 다양한 유파의 생기기 시작했다. 즉. 문학의 다양성이 추구되어 30년대 중반기는 문학사의 한 결절 지검으로, 본격화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했다. 1930년대 말 「까마귀(1936)」, 「복덕방(1937)」, 「밤길(1940)」등으로 우리 소설 문학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고, 《문장 강화》에 나타난 탁월한 미문가로 예술적 정취가 짙은 단편에 능했다. 이효석, 박태원과 달리 허무와 서정의 작품 세계 속에서도 시대 의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