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를 읊었다. 명실상부한 종실의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그냥 돌아간 모습을 통해서 그녀가 풍류 명사하고만 사귀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가려 사귀는 주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 ‘청산리벽계수야~’ 다시 읽기
표면적으로 이 시조는 황진이
황진이는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역사시간에 황진이는 자주 거명되었으며, 국어시간에도 고전시가 중‘시조’를 강의하는 시간에 황진이의 시조는 빠짐없이 제시되었다. 특히 최근에 서구에서 페미니즘이 밀려들어오면서 한국인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역사적 인물 중 여성으
황진이는 재모와 시가의 두 조항에 들어 마하였다. 말하자면, ꡐ출중한 재주ꡑ와 ꡐ경국의 미색ꡑ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한시와 시조․노래에도 뛰어난 명기를 꼽았다.
이러한 황진이인데도 그녀의 생몰 년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김지용의 『역대여류한시문선』(1973)의 「황진이
여성이며 기생이었던 황진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 황진이 연구는 전해지는 이야기를 취합하여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지만 이 또한 한정된 텍스트 내에서 작가 황진이를 알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나. 황진이의 생애
1. 출생
(1
황진이는 여성으로서의 평탄할 수 없는 자기 운명을 예견 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기녀의 길을 갈 결심을 내리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들 수 있다. 사료에 따르면 진이의 성격이 척당하여 남자와 같다고 하였다. 당시 이 땅의 여성들은 속박의 생활 속에서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