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고분 - 고대사연구회
1. 서언
한국의 역사 연구는 문헌사료가 부족하여 역사상을 복원하는데 있어 당시대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인 고고자료에 많이 의지한다. 주지하다시피 고대로 올라갈수록 문헌사료, 나아가 고고자료는 더욱 부족하여서 역사 연구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봉토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봉토분은 다시 봉토 속에 석실을 만든 석실총과 토축으로 꾸민 토광묘(土壙墓)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서로 연관이 있다. 공주시대 백제의 고분으로는 석실묘와 전축분을 들 수 있다. 이 시대의 전축분은 중국의 남조(南朝)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말에서 4~5세기는 횡혈식 장법의 고분들인 석실적석총과 석실봉토분, 벽화고분이 공존하는 시기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대외적으로 국력이 팽창하는 시기이다. 6세기 이후가 되면 석실봉토분과 사신도 중심의 벽화고분이 축조된 시기이며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다.
양전동 암각화 : 암벽에 새긴 조각,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 주위에 있는 모양은 밭이나 논을 묘사함, 기원을 하기 위한 것
고구려벽화 고분분포도 : 만주, 평양 중심으로 90여개
장군총 : 만주의 지반이라는 곳에 있음, 돌을 깍아서 쌓아 올림(적석총)
안악3호분, 357년 : 흙을 쌓아서 올림(봉토분)
봉토분에 비해 낙후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문화적 차이의 반영보다는 계급적 차이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내용을 통합해 보면 말갈과 고구려는 결코 다른 민족성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면 오히려 고구려가 있던 지역에서 피지배계급을 통칭 말갈이라 하였고 고구려는 지배계급을 의미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