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일냉수리신라비의 내용 검토
"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실성왕)·내지왕(乃智王: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503년) 9월 25일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
봉평비>에서는 나마군이 간군과 동등하게 회의체에 참여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따라서 경위 17등은 3등분해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11등으로 이루어진 외위는 지방민을 지급대상으로 하였다. 외위는 1등에서 7등까지의 간군과 8등에서 11등까지의 비간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간군외위는 7등
Ⅰ. 귀족의 출현
신라의 6부 문제는 냉수리비와 봉평비를 아룰러 검토해 보면, 탁과 사탁은 동일한 부에서 분화한 느낌을 갖게 된다, 첫째, 그 명칭상의 유사성을 들 수 있고 둘째, 사탁부 출신의 지증왕의 즉위하였으면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사료에서는 이것의 전혀 왕조교체나 혹은 왕의 출신
골품제가 신라사에 미친 영향
골품제는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신라 사회의 신분제이다. 그 성립시기를 놓고도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봉평비와 냉수리비의 발견으로 인해 법흥왕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6세기초에 골품제의 대강이 완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골품제가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 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 을 벗으로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